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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

교육학 - 한국의 근대교육

by 똑똑한우주맘 2022.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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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는 매우 복잡한 논의들이 이루어져 왔다. 근대를 자생적인 것으로 보는가 외생적인 것으로 보는가에 따른 논쟁이 있으며, 자생적인 것으로 볼 경우 그 기점을 언제부터로 잡을 수 있을지, 외생적 요인들의 자생적 수용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여러 논의가 있기 때문에 단순하게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근대에 대한 논의가 많은 이유는 전통적 교육과 근대 이후의 교육 사이에 급격한 제도적 단절이 있기 때문이다. 고대 시대부터 역사의 흐름으로 이어져 교육사를 보는 서양의 교육과, 전통의 교육과 근대의 교육이 단절된 한국의 교육은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교육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전반을 거치면서 서구적 모델을 따라 때로 완만하게, 때로는 급격하게 변화해 갔고,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전통교육과 근대교육이 단절적으로 나타나는 외형적 사례는 유교 기관에서 중요한 '제향 공간 교육적 의미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선인들을 모시는 제향 공간은 단순히 제사적 의미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인격적으로 모범을 닮겠다는 교육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서구식 교육 공간과 교과 체계의 도입으로 이러한 제향 공간이 지닌 전통적 기능은 퇴색하고 제도적 교육에서의 실질적 교육목표가 지식 획득과 공인된 학력 획득을 위한 것으로 변모하였다. 갑오개혁, 을사늑약 후 통감부 설치 등의 과정을 거치며 신교육의 제도적 기초가 형성되었으나 1880년대부터 전통적 교육에 대한 개혁의 논의들이 형성되었고 새로운 학교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특히 1883년에 설립된 원산학사는 전통적 서당을 개량한 개량서당의 형태에서 발전하여 근대적 학문을 가르친 기관이었다. 개항기 교육에 대해서는 선교사나 민간에 의해 설립된 사립학교들이 국가에 의해 설립된 학교보다 더 부각되었으나 정부 측에서도 군사 교육기관을 1881년에 설치하는 등 근대적 교육을 꾸준히 추진하였다. 전통적 교육과 근대적 교육이 제도적 차원에서 단절되기 시작한 것은 갑오개혁부터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전통적 교육기관을 대체하여 소학교, 중학교 등으로 구성된 새로운 학제가 선포되고 신분 제약 없이 모든 국민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전문적인 교원을 양성하기 위하여 한성사범학교가 설치되었다. 전통적 교육기관인 성균관이나 향교는 교육적 기능을 제도적으로 상실하게 되었으며 인재 선발의 통로로 900년 이상 존속되어 왔던 과거제도도 철폐되었다. 개항 이후의 한국은 당시 국제적으로 생존의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용 교육, 대중교육, 여성 교육의 필요성이 역설되었다. 1906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의해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근대적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는 더욱 고조되어 학교 설립 운동 등 자강을 위한 교육구국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며 민간 차원에서 다양한 학교들이 설립되었는데 통감부 측에서도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1908년에는 사립학교령이라는 법령을 내세워 이미 설립된 학교들을 철폐하거나 재인가하고자 하였다. 1905~1910년 자강운동 시기에 나타난 교육에 대한 높은 열의와 민족주의적 동기들은 식민지화 과정에서 저항적 민족주의의 중요한 기초로 작용하였다. 특히 현실의 정치적 패배를 보상해 줄 수 있는 힘의 원천으로 교육을 매우 강조하였는데 이는 사회진화론과 매우 관련이 깊다. 당시의 개화론자들은 승자들의 힘이 교육에서 비롯되었다고 이해하였으며 국민에 대한 교육을 통해 현실의 패배가 미래의 진보로 전환될 수 있다는 교육론을 전개하였다. 전통적 교육제도와 달리 개항기 교육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여성에 대한 제도적 교육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화학당을 필두로 하여 선교사 및 민간에 의한 여학교 설립이 꾸준히 이루어졌고, 사적 영역에 제한되어 있던 여성의 전통적 활동 범위를 확장해 공적 사회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1910년 강제 합방 이후 1945년 광복까지 일제 총독부에 의해 식민지 시기를 겪어야만 했는데, 이 시기에 일본에 의해 4차에 걸쳐 개정된 '조선교육령' 법령에 의해 규제되었다. 제1차 조선교육령에 의해 한성사범학교는 폐지되었으며 보통학교 4년, 고등보통학교 4년, 전문학교 등으로 구분하였다. 1919년 3·1운동과 문화통치 영향으로 제2차 조선교육령에 의해 교육연한이 일본과 동일해지는 형태로 변화한다. 그 이후 고등보통학교들에서는 대학 입학을 위한 준비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사실상 최종 교육기관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고등보통학교가 상급학교 준비기관으로 그 위상이 변화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제3차 조선교육령을 발령한 1938년에는 일본과 동일하게 학교 명칭을 소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 등으로 변화하였고, 1941년에는 소학교가 국민학교로 개명되며 본격적인 황국신민화 및 내선일체의 동화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어가 사실상 폐지되며 사립 중등학교의 설립을 금지하였고, 일본 역사, 수신 등의 이념 교과를 강조하였다. 1943년 제4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전시 교육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졌으며 신사참배, 학도대조직, 황국신민의 서 낭독 등 학교의 교육적 기능을 변절시키고 군사 체제화하였다.
식민지시기에는 왜곡적인 교육이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로 인해 이 시기의 교육의 제도적 변화에 대해서는 정치적 관점에서 평가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한편, 교육적 변화를 중심으로 볼 때 전통적 교육기관에서 근대적 학교로 학생층이 이동하며 입학난이라고 불릴 정도로 입학 경쟁이 강화되는 양상 등은 근대적 학제와 학력주의가 이 시기 동안에 정착하고 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1920년 이전에는 전통적 서당에 비해 저조했던 보통학교 취학률이 1930년대 이후에는 엄청나게 수요가 증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요자 부담에 의한 학급 증설과 학년 확대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교육열에 의해 보통 학교 교육이 확대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제도 확대 결과라기보다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근대적 교육을 하나의 권리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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