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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

교육학 - 한국의 전통적 교육(삼국시대~고려)

by 똑똑한우주맘 2022.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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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교육사를 볼 때 주목되는 것은 '단절성'이다. 서양의 교육사는 고대와 중세, 근대까지 이어져 교육의 전통이 연속성을 유지해 왔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19세기 말 이후 급격한 단절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서양의 교육사와 큰 차이점이 있다. 우리나라는 19세기 말 이후 서양의 교육 이념과 제도가 우리나라의 전통적 교육의 이념과 제도를 대체하게 되는 큰 변화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 교육에서 계승할 것들과 현대적 교육의 요소들을 조화롭게 취하여 우리 교육의 정체성을 역사적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한국교육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한자와 유교의 도입은 제도적 교육의 성립에 큰 역할을 하였다. 교육에 영향을 준 사상적 원류는 불교, 도교, 각종 민간신앙 등 다양하지만, 제도교육의 형성과 발달에 영향을 직접 준 것은 유교이다. 춘추전국시대는 통일적 왕조 없이 제후국이 땅을 나누어 차지하고 지키던 시기로, 정치적으로는 무질서하고 학문 사상적으로는 백가쟁명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처럼 다양한 학문적 입장들이 난립하던 시대였다. 유교는 그 당시 사상가인 공자의 사상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공자의 '정명론'은 "군군신신부부자자"라는 표현에 잘 드러나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유가는 현실적이면서도 개혁적인 이상을 추구하는 학파로 춘추시기 이전 서주 시대의 정치질서를 이상화하는 입장이었다. 종법 제도와 봉건제도에 기반을 둔 군주 중심의 도덕적 정치로의 회복을 추구하며, 당시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각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른 역할을 바르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 유가에서 가장 기본적인 인륜적 가치는 가족 윤리의 기본인 '효'와 '자'인데, 이러한 관계가 사회적으로 확대되는 것을 추구하였다. 유가가 추구한 인간애는 자기 부모를 사랑하는 자연스러운 인간애를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에서 특히 제도적 교육이 발달하게 된 배경은 치자의 학문이라는 점과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봉건적 통치체제를 정당화하는 정치이념이었던 것과 관련이 깊다. 개인의 마음을 다스리고 인격 수양을 지향하는 교육원리를 지닌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고 선발하는 것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유교적 이념은 국가의 지배적 이념으로 채택되기 쉬운 조건을 가지고 있었으며 왕권 강화를 위한 이념적 기반으로 가능하였다고 할 수 있다. 유교적 국가에서의 가장 큰 특징은 인재를 선발하기 위하여 과거제도를 실시했다는 점과 인재 양성을 위한 국가 교육기관인 관학을 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재 양성과 선발의 노력은 국권 혹은 군권의 강화와 관련되며 귀족권 혹은 신권과 대립하는 개념이다. 국가는 관료제를 통하여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갖추고, 유교의 제도는 그러한 왕권의 강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유교적 학문은 자기 수양의 학문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을 위한 학문이기도 하였다. 유교적 교육이 제도화되는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며, 국가통치의 이념으로 정비되는 고려, 조선 시대를 거쳐 유교적 교육의 제도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삼국 중 고구려는 최초의 관학이자 고등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태학'이 중앙에 설립되어 있었으며 지방에 '경당'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에는 삼국시대에 백제의 '오경박사'가 일본에 학문을 전한 기록이 있어 유학 교육이 상당한 정도로 발달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나 학교 제도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통일 이전 신라의 경우는 화랑도의 교육 기능이 주목되어 왔다. 화랑도는 유교, 도교, 불교의 사상이 혼합되어 이루어진 무사 조직으로, 국가에 의해 지원되고 인정되어 인재 선별에 활용되었다.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 신문왕 2년에 국학 체제를 정비하였는데, 국학의 교육목적은 유학 교육이며 15~30세의 6두품 귀족 자제만 입학할 수 있었다. 교과과정은 논어, 효경을 필수로 수준에 따라 세 과로 나누어 부과하였으며 수업연한은 9년이었다. 졸업 후에는 관등의 자격을 부여했으며 '독서삼품과'를 두어 관리 선발에 활용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관학과 사학, 과거제도 등 유교적 인재 양성 및 선발의 체제를 갖추었다. 고려시대의 교육제도를 크게 관학과 사학, 과거제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먼저 관학은 국가에 의해 설립된 교육기관으로 유교적 교육의 상징인 문묘를 설치하여 공자 및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중앙의 국자감은 성종 11년 왕명에 의해 창건되었고, 인종 1년에는 식목도감을 설치하여 학식과 학규를 완비하였다. 국자감은 국자학, 태학, 사문학, 율학, 서학, 산학의 6학으로 구성되었다. 24대 원종 1261년에는 '동서학당'을 설치하였는데, 중앙에 위치한 학교로 향교와 비슷한 수준의 교육기관이었다. 지방의 관학으로는 향교가 있으며, 처음에는 국가에서 박사를 파견했으나 후에는 지방관청에서 초빙하거나 지방의 수령이 직접 교육을 맡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의 사학으로는 12도가 있는데, 최충이 문헌공도라는 사학을 설립하자 유학자들이 이와 유사한 학교들을 세우게 되었는데 유명한 11개를 더하여 12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12도는 과거시험 준비기관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고려 말에는 쇠퇴하였다. 지방의 대표적 사항으로는 서당이 있으며 여러 기록을 보면 당시 서당이 상당히 발달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시대의 인재 선발제도로는 과거제도와 음서제도가 있으며, 인종 때 과거 시행법인 '과거절목'을 제정함으로써 과거제가 완비되었다. 과거는 3년에 한 번, 3단계로 실시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과거를 채점하는 시험관과 시험을 보는 급제자 간에 비리가 있어 문제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 고려 말에는 시험관을 한명으로 두었고, 왕이 직접 시험관이 되는 '전시'를 포함한 '과거삼층법'을 도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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