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숭상한다는 뜻의 '억불숭유'정책에 기반을 둔 조선 초기 정책이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유교가 여러 정책이나 사상을 지배하고 있어 유교적 원칙과 이념을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이 매우 강하게 부각되던 시기였다.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는 관학, 사학, 선발제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 교육제도의 틀은 크게는 고려시대의 것을 계승하였으나 그보다 발전한 제도를 가지고 있다. 먼저 관학으로는 성균관, 4학, 향교 등이 있었으며 왕실 교육기관과 기술을 가르치는 잡학 교육기관들도 있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국립 교육기관은 성균관으로 학문을 갈고닦는 강학활동과 더불어 각종 의례가 행해지던 공간이었다. 성균관은 생원, 진사를 원칙으로 입학 자격이 주어졌고, 정원은 200명이었다. 경국대전, 원점절목, 권학사목, 학교사목 등의 여러 규칙을 두고 교육 과정과 평가를 실행하였고, 유생들에게는 자치활동이 허용되어 여러 집단활동이 이루어졌다. 성균관에서는 총 300점을 획득해야 문과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는데, 이는 인재의 양성과 선발을 연관시키고자 하는 원칙에 의한 것이었다. 두 번째로 4학은 고려 말의 5부학당을 계승한 것이었는데, 성균관의 부속학교와 같은 성격을 지닌 학교로 지방의 향교와 비슷한 수준의 교육기관 역할을 하였다. 세 번째로 향교는 1읍 1교 원칙에 따라 세워진 지방의 대표적 교육기관이었다. 입학은 16세 이상의 양반 및 향리 자제에게만 자격이 부여되었고, 정원은 행정단위에 따라 다르게 정해져 있었다. 조선시대의 사학기관으로는 서원과 서당을 살펴볼 수 있다. 서원은 중종 38년 1543년에 풍기 군수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지은 것이 최초로 중국 송대 주자에 의해 설립된 백록동서원을 따라 설립된 것이다. 백운동서원을 시작으로 명종 5년 1550년에 풍기 군수로 부임한 이황이 중국 백록동서원의 예를 들어 국가에서 재정 지원을 해 주라고 요청하여 지어진 것이 사액서원의 시작이다. 서원의 특징으로는 특정한 인물(선현)의 학식을 기리기 위한 사당을 두는 향사의 기능을 갖추고 있었으며, 학령의 규제를 덜 받았고 학문 활동과 수양을 하며 조선 중기 사회와 정치를 주도한 세력인 '사림'들의 터전이 되었다. 그러나 서원의 난립과 사액서원이 증가하며 국가재정의 손실로 이어져 고종 때에 47개소의 서원을 제외하고 모두 폐쇄하였다. 조선시대의 서당은 주로 지방에 거주하는 선비들을 위주로 설립되고 운영되었으나, 신분제 변동으로 18세기 이후에는 평민층에서 광범하게 분포하였다. 18세기 이후 서당들에서는 유교적 명륜기능이 쇠퇴하고 몰락한 양반인 '잔반' 출신의 훈장들에 의한 모반 사건들도 보고되는 등 조선 후기 사회 해체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많았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문과, 무과, 잡과의 세 종류로 나뉘었고, 3년에 한 번씩 실시하였다.
조선 후기로 들어서며 정치적으로는 당쟁이 심화하여 권력의 독점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사회경제적으로는 양난 이후의 생산력 발달과 신분제 변동으로 몰락 양반과 부유한 평민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또 문화적으로는 청학의 도입으로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는 등 사회적 변화가 뚜렷해졌다. 이러한 변화들로 인해 교육기관들도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유교적 이념과 원칙에 의해 설립되었던 것들이 변질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각종 제도는 본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여러 사회 변화 등과 연계되어 성균관에서의 거관유생의 감소, 원점제 해이, 향교에서의 강학기능 쇠퇴, 서원과 남설과 정쟁, 과거제도의 문란, 서당의 탈명륜화 등의 주목되는 변화로 이어졌다. 이 문제는 조선 후기에 나타난 정쟁의 결과로 다수의 지식인이 자신의 학문적 뜻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으로 연결되었으며, 그들로 인해 새로운 학문적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실학자들은 교육제도의 개혁을 요구하였고, 인재 양성 및 선발 방식의 변화를 요구하는 제안들도 많이 나타났으며 교육 내용이나 방법적 측면에서 새로운 논의들이 등장했다. 조선 중기의 실학자인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글을 뛰어나게 잘 짓는 사람을 위주로 인재를 선발하는 기존의 방식은 올바르게 공부를 수행할 수 있는 인물을 가려낼 수 있는 적당한 방식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품행과 학식을 장기간의 체계적 양성과정을 통해 관찰한 후 뽑는 '공거제도'를 제안하였다. 또한 그는 유교적 능력주의의 회복을 주장하였다. 또한 실학자들은 기존의 교재들에 대한 비판도 제기하였다. 특히 정약용은 글자구성 등이 문자 학습의 원리에 맞지 않음을 비판하며 문자서를 직접 제작하였다. 그가 쓴 책인 '아학편'은 총 2,000글자로 되었는데, 유형자 다음에 무형자를 배치하고, 다른 교재들과는 달리 사람을 뜻하는 '인'을 가장 먼저 배열하여 인본주의 사상을 잘 나타내었다. 이는 실물적이고 구체적인 글자들부터 익히게 함으로써 보다 체계적인 방법으로 한자어를 익히도록 한 교재다. 그는 천자문 불가독설, 사략통감 불가독설 등 기존의 교재들에 대한 비판도 제기하였는데 천자문과 사략통감은 모두 중국의 책으로 내용이나 구성적으로 결함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손으로 아동의 교재를 직접 편찬하여 우리에게 맞게 사용되어야 한다는 주체사상과 국학정신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변화들은 19세기로 들어서며 근대적 교육개혁 논의들이 등장하며 전통적 제도의 이념과는 다른 교육체제로 변화해 가는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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